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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전공/지리학과

[여행/상주] 경북 상주의 가볼만한 곳 추천 '상주임란북천전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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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상주] 경북 상주의 가볼만한 곳 추천 '상주임란북천전적지'


2011년의 여행 포스팅을 하고 싶어졌다.

최근에 다녀온 여러 여행들에 대한 글도 쓰지 않은 채 과거의 기억을 꺼내오는 것은 

여전히 그 당시의 기억들에 얽매여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2009년 3월, 당시의 난 참 즐거웠다.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부터 꿈꿔왔던 내 미래를 위해 

휴학을 하고 '진짜 공부'를 시작했던 그 시절의 난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고,

술을 마시지 않아도 콧노래가 나왔다.



2010년 3월, 약 1년 간의 준비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며칠 간 밥도 잘 넘기지 못하며 좌절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희망을 갖고 있었기에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매일 밤 불꺼진 학교를 내려가며

그 상쾌한 공기를 마시는 것이 정말 행복했던 것도 일조했다.

당시의 난 정말 행복했다.



2011년 3월, 약 2년 간의 휴학 공부 끝에야 깨달았다.

나와는 그리 잘 어울리는 시험이 아니었다는 것을.

법에 대해 관심이나 흥미를 갖고 있다는 것과

법을 잘 다룬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범주라는 사실을.


그렇게 난 2011년 3월 혼자 끙끙 앓으며

정말 많이 울었었다.

밥을 먹다가도 울고 잠을 자다 일어나서도 울었다.

거울을 보면 멍청하고 한심한 내 모습이 보여 울었고

거울을 보기 싫어 고개를 돌리면 몇 년 간 공부의 흔적이 보여 다시 울었다.

흔적을 치우려하다 다시 그 흔적에 잠겨 울었고

아무것도 보기 싫어 눈을 감으면 까만 세상 속에 내 모습이 떠올라 또 다시 울었다.


어쨌든 이렇게 매일 같이 눈물을 흘리던 그 시기에 갔던 여행이

바로 오늘 포스팅할 상주 여행이다.


결국 내 인생의 목표나 꿈 등  모든 것을 포기한 나는

아무런 의미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런 내가 너무나도 한심해보였는지 친구들이 끌고 갔던 곳이 바로 상주.


우울함을 모두 떨쳐내진 못했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친구들과 멀리 떠나니까 너무나도 행복했었다.



2013년 3월, 나는 과거 포기했던 꿈에 다시 한 번 도전했었지만

보기좋게 다시 나가떨어져버렸다.

영화나 드라마들 보면 포기 않고 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은 

결국 고난을 이겨내고 그 꿈을 이루고야 말던데,

아무래도 난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은 못되나보다.


그리고 2013년 9월, 요즘은 그냥 삶이 무미건조하다.


목표의식이 불분명해진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이 또 있을까.


이것이 바로 오늘 2011년 3월의 여행 사진을 다시 꺼내든 이유이다.


분노하고 싶다.

모자란 내 자신에 분노하고 

이를 갈며 다시금 나를 채찍질 하고 싶다.

그러나 그러한 분노가 더이상 일지 않음은 나를 너무 울적하게 만든다.

괜시리 혼자 우울해진 추석 연휴인 듯 싶다. 아아



이게 여행기인지 고해성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목이나 카테고리 모두 여행기인만큼 이제 상주임란북천전적지의 사진들을 시작.





버스를 타고 상주시에 들어갈 때 

나를 가장 먼저 반겨주던 상주시의 명판.


참고로 사진 속 중앙 기와집 같은 것이 바로 임란북천전적지이다.


문득 등교하면서 서울역을 지날때면 보이던 '명실상주'라는 상주시의 광고가 떠오른다.



유적지 앞에 흐르던 하천.


하천을 중심으로 주변은 사람들의 수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천에서 찍은 사진.


당시 쓰던 핸드폰은 노키아 5800, 익스프레스 뮤직이었는데,

칼 짜이츠의 렌즈를 탑재하여 생각보다 굉장히 사진들이 이쁘게 뽑혔었다.

물론 이 포스팅의 모든 사진들 또한 당시 그 핸드폰으로 찍은 것.


근데 이상하게도 이 하천 사진만큼은 굉장히 별로이다.





상주임란북천전적지의 정문.


향교나 성균관 등의 양식처럼 이 곳 또한 가운데 문은 닫아두었다.

유적지에도 이러한 문 양식을 쓰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비록 공자나 맹자의 혼은 아니라도

임란 때에 숨을 거둔 영혼들을 위한 것이 아닐까.




아 


입구에서 가운데 문을 열지 않았던 이유가 이 사진에서 밝혀진다.

이런 사진이 있었는지도 기억 못하고 있었는데

이 유적지 속에도 위패를 모시고 있었나보다.


**

1990년부터 연차적으로 사당ㆍ전시관ㆍ사적비 등을 세우고 원래 있었던 박걸 단소(壇所) 및 권길 사의비(死義碑, 殉節碑)를 이건하여 사적공원으로 조성하고, 충의사(忠義祠)를 건립하여 순절한 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991년에는 상주상산관(尙州尙山館,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7호)을 이 곳 만산동에 옮겨 함께 관리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란북천전적지 [壬亂北川戰跡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7354&cid=1592&categoryId=1592





관군과 의병이 합세하여 전투를 치룬 곳인만큼

그 기념비에도 이러한 특징이 잘 나타나있다.


갑옷을 입고 활을 쏘는 관군과 평복을 입고 창을 든 농민.


??


지금 생각해보니 임진왜란 당시의 모습인데 농민이 삼지창을 들고 있다니 조금 어색해보인다.

임진왜란 이후에야 도입 된 것이 바로 삼지창 아닌가.

세 개의 날이 서있는 모습을 보니 누가봐도 농기구가 아닌 '당파'가 확실하다.


뭐 비록 역사적으론 명나라에서 수입해 온 것이지만,

그냥 의병들이 사용하여 효과가 좋자 군에서 이를 도입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유적 속 사진에 맞춰 내 기억을 조작해본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이대로 글을 마치고 쉬고 싶기 때문이다.

삼지창에 관하여는 네이버 등에 조금만 검색해도 여러 정보가 많을테니

이 글을 읽고 갸우뚱 하시는 분이 있다면 꼭 그것들을 참고해보시는게 좋을 듯 싶다.



어쨌든 이것으로 상주임란북천전적지에 대한 나의 포스팅은 끝.

사실 이게 어딜 봐서 여행 포스팅인지 잘 모르겠다.

어쩐지 그냥 내 푸념이나 늘어놓은 똥글이 되어버렸다...


뭐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정말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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